이제 레(Leh)를 출발,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지난 일정을 돌이켜 볼 때, 마날리(Manali)애서의 이틀이 '10대의 풋풋한 설레임'이었다고 한다면, 사추(Sarchu)의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이곳 레에서의 사흘은 '어느 봄날 갓 피어난 살구꽃같은 20대의 수줍음'이었다. 이 오아시스에서의 아늑한 행복을 한 장의 추억거리로 남기고 떠나자니 아쉬움이 컸다.
새벽 4시경 기상. 뱃속은 여전히 불편하지만 어제보다는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어제 저녁에 먹다남긴 죽을 새벽녘에 꼭 챙겨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신 분의 성의를 생각해서 몇 숫갈이라도 떠 먹어야겠으나 우선은 속을 비우는 편이 나을듯 싶어 그분이 당부한 대로 하지 못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곳 숙소인 Khayul은 가족들이 기거를 하면서 직접 운영하는 호텔로 자기 소유의 차량도 여러 대 보유하고 있어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주인이 기거하고 있기 때문에 손님들의 불편사항을 제 때 챙겨주었고, 또 주방시설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어 라면과 같은 간단한 식사를 직접 지어먹을 수 있다는 점이 편리했다. 출발에 앞서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얼마 전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는 "세계 최고의 트레킹 10선"을 소개한 바가 있다. 이에 따르면 '인도의 라다크 트레킹'을 그 첫번째 코스로 꼽고 있다. (라다크 이외의 지역은 '2. 호주 오버랜드 트랙;크레이들 마운틴에서 세인트클레어호까지 이르는 코스', '3. 미국 자이온 트랙;그랜드캐년, 브라이스캐년과 함께 미국 서부 3대 협곡의 하나인 자이온협곡을 통과하는 코스', '4. 뉴질랜드 루트번 트랙;피오르드 국립공원에서 마운트 아스파이어링 국립공원을 지나는 코스', '5. 페루 잉카 트레일;잉카문명이 건설한 고대 도로의 일부로 풍부한 자연환경과 유적지, 사회문화를 만날 수 잇는 코스', '6. 서아프리카 말리공화국의 페이스 도곤', '7. 네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8. 프랑스 랑도네 트레일', 9. 프랑스-스위스의 오뜨 루트; 프랑스 사모니 지역의 몽블랑과 스위스 체르마트 지역의 마테호른을 연결하는 코스', '10. 파키스탄의 발로트 빙하-K2'이다)
고등학교시절 새로 부임하신 국어선생님(시인 이생진 님)께서 전교생앞에서 이렇게 부임인사를 하셨다. "국문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내가 한국 근대문학의 본산인 보성에 오게 된 것은 실로 가던 날이 장날이 아니라 가던 곳이 장터가 아니겠는가"라고. 내가 이번에 얼떨결에 여행길에 오른 곳이 세계 10대 트레킹코스 가운데에서도 으뜸이라니 나도 이 대목에서 은사님의 흉내를 그대로 내어 봄직하지 않은가? 가던 곳이 장터였노라고.
지금부터 지나는 곳이 라다크 트레킹의 진수지역인 알치(Alchi), 라마유르(Lamayuru)가 될 것이다.
알치는 레에서 스리나가르 방향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해발 3,250m. 저 멀리 설산, 그리고 건조하다 못해 쩍쩍 갈라질 것 같은 황량한 풍경속에 자리한 싱그러운 녹색의 향연, 샛노란 유채꽃들, 밀밭의 황금빛 물결, 들판 어디선가 아련하게 들려올듯한 밭을 가는 라다키들의 노동요 소리. 어떤 몽상가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법한 극단의 조화, 극단의 색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알치다.
알치는 지형적으로 참으로 묘한 지역이다. 인더스강을 가로지른 다리 하나만 봉쇄하면 외부로부터의 침공이 불가능한 천혜의 난공불락의 요새다. 이런 지형적 이점덕분에 라다크지역 모두가 이슬람의 말발굽이 휩쓸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알치는 곰파를 비롯한 불교문화유산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알치곰파(Alchi Chhoskhor Temple)는 서기 1020년부터 14년간에 걸쳐 조성된 천년의 불교사원이다. 법당내부의 목조 비로자나불, 관음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살아 숨쉬는 현신을 대하듯 신비한 느낌을 가지게 할 만큼 그 조각의 현란한 섬세함이 감동적이다. 법당 외부의 목조 프레임의 디테일도 놓칠 수 없는 감상 포인트 중의 하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큰 감동을 준 것은 곰파의 채색벽화였다. 천년의 세월을 비웃듯 벽에 굳어진 단단한 채색은 아잔타나 중국 둔황에 결코 뒤지지 않는 예술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 척박한 자연속에서 그 붓칠 하나 하나가 천년의 세월을 넘어 이처럼 생생하게 살아남아 그 종교적 숭고함을 고스란히 우리 앞에 전하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알치곰파의 문화가치적 희소성을 인정하여 세계문화유산의 지정이 추진중에 있다고 한다. 모쪼록 이를 통해 좀 더 체계적인 보존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곰파순례를 마치고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았다. 마을 집집을 돌아 흐르는 맑은 샘물, 담장너머 무르익은 샛노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자두나무들, 황금빛 밀밭, 그리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라다키 여인네들. 라다크 최고의 전원마을이라고 하는 말이 전혀 손색이 없다.
마을을 거닐다가 너른 정원에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2층집 앞에 나는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듯 걸음을 멈춰 섰다. 아, 이곳! 깊은 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엄청난 수의 별무리가 가슴을 설레게 하고, 내가 서 있는 곳, 이곳은 대기권을 벗어난 어느 우주의 또 다른 별이 될 것이리라. 시간을 붙들어 매고 싶다. 만약에 내가 인도를 다시 방문한다면 그것은 오롯이 이곳에 가기 위함일 것이다.
훗날을 기약하며 알치를 떠나 다음 기착지인 라마유르(Lamayuru)로 향한다. 레에서 서쪽으로 125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마을이다. 해발 3,507m. 나무 한 그루 없는 척박한 산등성이 위에 그림처럼 서 있는 라마유르 곰파(Lamayuru Gompa)로 유명한 곳이다.
도로 앞 구멍가게에 앉아 산등성이 위의 곰파를 올려다 본다. 장관이다. 곰파까지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아 이곳에 앉아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청년들 일행은 시동이 안 걸리는 오트바이와 씨름을 하고 있고, 산위에서 내려온 할머니들은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 올라타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차를 세우는 사람이나 이들을 태워주는 운전수나 그저 천연스럽다. 구멍가게 앞 우물가에서 물을 받는 아이들은 물받는 일보다는 물장난에 더 신이 난 듯 하다. 배낭을 뒤져 갖고 있던 자일리톨 껌을 청년들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문득 내 어린 시절에 동네 아이들이 미군트럭을 쫓아가며 "껌, 껌"하면 미군들이 우리들에게 껌을 던져주던 일이 생각났다. 내가 이들에게 베푼 작은 호의가 이런 수치스런 기억으로 남지 않아야 할텐데...
우리들의 일정에 여유가 있어서 차량을 이용해 곰파가 있는 정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11세기 티벳불교의 유산인 이 사원에는 어린 동자승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개구장이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다. 머리에 기계총 흠집을 달고 다니는 아이들도 여럿 보였다. 우리 어린 시절에도 학교에 가면 기계총에 걸린 아이들이 꽤 많았었는데, 요즘 아이들이 이런 걸 알기나 할까? 동자승들에게는 준비해 간 볼펜을 나누어 주었다. 소용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원에서 우연히 라다키 할머니 두 분을 만났다. 멋지게 사진 한 장 찍어 드렸다.
사원에서 내려다 보는 정경은 잿빛으로 황량하다. 그러나 하늘은 눈이 시릴정도로 푸르다. 이래서 살아가는 것일까? 현실은 힘들어도 돌아올 미래는 저토록 눈부실 것이라는 바램이 있으니까.....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고, 저들의 깊은 속을 한 나절 스쳐가는 이 여행객이 어찌 헤어릴 수 있으랴?
*알치로 들어가는 입구
*알치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인더스 브리지. 인더스강물의 빛깔이 짙은 회색이다.
*알치로 들어가는 차량은 운전기사를 이곳 사람들로 교체해야 한다고 해서 잠시 대기중인 일행
*타타씨와 기사아저씨들이 뭔가 재미있게 이야기 중. 타타씨 밀집모자 머리부분이 뚫어졌다. 타타씨는 겉보기는 완벽한 현지인 수준이다^^
*알치곰파
*알치곰파의 채색벽화. 천년의 빛깔이 뚜렷하다
*곰파 외부 목조프레임이 매우 세밀하다
*알치마을의 어린 천사, 순진무구한 웃음이 아름답다
*마을 골목길. 마을의 가옥이 모두 수로로 연결되어 있다. 아주 조용하고 한가한 느낌
*알치에서 마주한 꿈의 궁전. 이곳에서 시간을 잊고 지내고 싶다.
*라마유르에서 만난 라다키 여인들
*여인들이 지나는 트럭을 불러세워 타고, 서양 여행객들도 덩달아 올라탄다
*도로 구멍가게에서 올려다 본 라마유르 곰파, 그림같은 풍경이다
*라마유르 곰파에서 내려다 본 정경
*라마유르 곰파
*라마유르 곰파 너머 가옥들. 사원의 승려들의 기거 숙소인듯
*사원외벽의 채색 벽화
*사원에서 만난 라다키 할머니 두 분, 두 손에 염주를 연신 돌리고 계시다
*사원에서 만난 동자승들. 표정이 앳되다
*사원에 붙어 있는 식당이며 구멍가게. 승려들도 출입
*하늘 빛이 너무 푸르러 눈이 시리다
* 그림엽서에 나타난 마음씨 좋아 보이는 라다크 여인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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