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인도로 가는 길(기행 7-2) - 레(Leh) : 웅장한 자연과 소박한 라다키들의 평화로운 정경

양현재 사색 2011. 9. 15. 02:23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레(Leh)에서의 첫날 밤은 질박하지만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숙면을 했나보다. 아침 햇살이 찬란하고, 맑은 아침 공기를 한껏 머금은 들꽃들은 눈부시다. 대지를 온 몸으로 쓸어안듯 머리를 뒤로 제끼고 몸을 활처럼 펼치며 우주의 대기운을 폐부 깊숙히 빨아들여 본다. 아 ! 이 행복의 가슴 떨림이여.

 

라다크 최대의 도시답게 이곳에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볼거리들이 즐비하다. 그렇지만 이곳은 여전히 해발 3,500m에 이르는 고산지대. 자칫 볼거리에 집착하다보면 고산병으로 인해 들어눕기 십상이므로 욕심은 금물이다. 제한된 일정을 감안할 때 오늘 하루동안 소화할 수 있는 여행코스는 두가지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듯 하다. 첫번째는 레시내 및 외곽에 산재한 왕궁과 곰파들을 둘러보며 신들이 창조한 웅대한 자연과 그곳에서 신들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코스고, 두번째는 창스파 일대의 농수로에 나 있는 자그마한 둑방길을 따라 레시내를 천천히 산책하면서 라다크인들의 평화로운 삶의 모습을 둘러보는 코스다. 

우리 일행은 자신들의 취향과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자연스럽게 두 그릅으로 나뉘었는데, 나는 첫번째 코스를 선택하였다. 두번째 코스도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 있겠으나, 첫번째 코스를 선택한 것은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이곳 사람들이 지나온 삶의 궤적을 짚어봄으로써 이들의 삶의 모습의 전형을 더듬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정은 하루 온종일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인 채 짚차를 타고 먼지나는 비포장 도로를 옮겨 다녀야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만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체력적인 상태가 받쳐 주어야만 가능할 일이다.

 

내가 탄 짚차에는 당초 5명의 일행이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2명이 돌연 일정을 변경하는 바람에 H씨, S씨와 함께 3명이 하루 여행을 하게 되었다. H씨는 중국을 거쳐 티벳까지 여행을 다녀온 이 분야의 베테랑이시고, S씨는 나처럼 이런 식의 여행이 처음인 분이었다. 

 

처음 찾은 곳은 레에서 약 15km 떨어져 있는 라다크 왕조의 여름 궁전인 쉐이 왕궁(Shey Palace). 남갈왕조시기인 1645년에 건설되었지만 이 후 카쉬미르와의 전쟁으로 오랫동안 페허로 남아있던 곳이다. 이 때문에 왕궁으로서 보다는 왕궁 안에 있는 곰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곰파안에 있는 12m규모의 초대형 불상은 무려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데 1980년 틱세곰파에 미륵불이 모셔지기 전까지만 해도 라다크에서 가장 큰 불상이었다고 한다.

곰파를 오르는 언덕길에서 우리 짚차가 내뿜는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이 곳으로 기도를 드리러 가는 3명의 라다키 가족 일행과 마주쳤다. 차안에 앉아 있는 나는 불안하기만 한데, 먼지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듯 쉬지않고 주문을 외우며 언덕길을 오르는 그들의 얼굴은 마냥 평화로워만 보였다.

곰파에서 내려다 보는 레 시내 외곽도시의 푸르름이 시원하다. 나는 난간 끄트머리에 걸터 앉아 한 때 저 아래에서 우러러 보았을 이곳 왕궁의 위엄과 곰파의 웅장함을 그려 보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을 사람들과 그들이 누렸을 모든 영화는 한낱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고 낯선 나그네의 마음엔 허무한 감상만이 가득하다.   

 

 

 

 

 

 

 

 

 

*쉐이곰파에서 내려다 보이는 레 외곽 정경

 

 

 

*곰파에는 이런 대형 기도원통이 있다. 이를 돌리면서 소원을 빌어보았다

 

쉐이왕궁을 나와 찾은 곳은 레 근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곰파로 손꼽히는 틱세곰파(Tikse Gompa).깎아지른 듯한 언덕위에 마치 요새처럼 우뚝솟은 모습은 오래전에 프랑스 노르망디해안에서 보았던 수도원 몽쉘미쉘(Mont Saint Michel)을 연상시켜 주었다.

설산과 황량한 고원 가운데로 인더스강이 흐르고 있는데, 강가 주변만 녹음이 우거져 있어 자못 그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14세기에 세워진 틱세곰파는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으나 불상의 영험함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사원은 급속도로 성장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의 작은 법당에는 당시로부터 내려오는 불상들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한 점은 신상들의 눈이 모두 흰 천으로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눈에서 나오는 영적 에너지를 막기위함이라고 하는데, 봉안은 매년 1년에 단 1회 뿐인 티벳 가면축제기간에만 풀린다고 한다.

틱세곰파의 본존불격인 거대한 황금미륵불은 1980년에 조성된 탓에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없는 편이나, 공들여 만든 불상의 미소가 보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평화롭게 만들어 준다.

영험하다는 말을 듣고보니 새삼 불심이 일어난다. 함께 한 일행분과 두 손을 모아 경배를 드렸다.

 

*틱샤곰파의 아름다운 모습. 붉은색의  곰파아래쪽의 집들은 승려나 민간인들의 가옥

 

*황금미륵불. 달라이라마 사진이 옆에 보인다

 

 

 

이어서 찾은 곳은 레에서 45km 떨어진 헤미스(Hemis). 이곳은 최소 1,0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16세기 남갈왕조기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사원 내부는 라다크에서 가장 큰 곰파라는 별칭에 걸맞을 정도로 화려하다. 특히 본당 건물 안쪽에 있는 벽화에는 부처의 전생담을 비롯해 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워낙 건조한 지역이라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훌륭하다. 헤미스는 참(Cham) 또는 체추(Tse-Chu)라는 이름의 티벳 가면축제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약 1,000년의 역사를 지닌 가면극형태의 예불이라고 한다. 원래는 12년에 한 번, 원숭이 해에만 축제가 치루어 졌으나 오늘날에는 관광상의 이유로 매년 가면축제를 열고 있다고 한다.

이곳 곰파에서는 승려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우리나라의 스님들과 같은 엄숙함은 없어 보였지만 구도해탈에 집착하지 않는 듯 천연(天然)한 얼굴은 오히려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구도해탈도 집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인연살이에 의한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스톡왕궁(Stock Palace). 카쉬미르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뒤, 왕국의 수도인 레까지 빼앗긴 채 역사의 무대에서 쓸쓸히 퇴장한 남갈왕조의 궁전이 있는 곳이다. 수도를 빼앗긴 채 레 외곽으로 밀려 난 왕족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물품들이 5개의 방에 나뉘어 전시되어 있었다. 왕궁의 흔적을 찾기에는 너무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히려 입장료를 받는 관리인 여자 두 사람의 한가로운 모습이 여행객의 흥미를 끌었을 뿐.

 

*왕족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이렇게 빡빡한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나니 역시 무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워낙 건조한 날씨인지라 햇볕은 더욱 따갑다. 신기한 것은 하늘에서 태양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너무 높은 지역에 올라와 있어서일까? 하늘이 좁아진 때문일까? 

 

호텔로 돌아오는 짚차안에서 잠깐 잠이 든 모양이다. 오늘 하루 레시내에서 한가한 일정을 보낸 일행들이 우리를 맞으며 안되 보인다는 표정을 짓는다. 샤워를 하고 났는데도 저녁식사시간까지는 꽤 여유가 있다.  기왕에 무리한 김에 오늘 하루 일정을 같이 한 일행 두 분과 다른 일행들 그리고 4명의 젊은 여성들 일행과 함께 샨티 스투파(Shanti Stupa)를 방문하기로 했다.

샨티 스투파는 '평화의 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일본 불교종파의 하나인 일련정종(日蓮正宗)은 전 세계 약 20여곳에 샨티 스투파를 세웠는데, 이곳 레에 있는 것은 그 가운데에서도 백미로 손꼽힌다고 한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설산을 배경으로 서있는 순백의 미얀마식 불탑이 매우 자극적이다. 제2차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인 일본인이 평화를 기원하여 이곳에 조형물을 건립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보였다.

이런 께름빅한 기분만 배제한다면 이곳에서 바라보는 레의 전경은 압권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뭐니뭐니해도 이곳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이야말로 레에서의 추억을 간직하기에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많은 서양 관광객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시시각각 다양한 색상으로 설산을 채색해 나가는 장관에 그저 넋을 놓고 있다. 아, 로탕패스 밤하늘의 별무리여! 샨티 스투파 언덕의 황혼의 물결이여!  Thanks, God!   

 

 

 

 

 

 

 

 

 

*샨티 스투파의 황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