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부터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는 기도시간을 알리는 수도승의 고함소리, '아잔'은 밤 늦도록 이어졌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아잔은 마치 천둥소리와 같이 저 멀리에서 나지막하게 시작되었다가 어느 틈엔가 바로 머리 위까지 몰려왔다가는 메아리처럼 저 멀리 어디론가로 아득하게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끊어질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낯선 외침은 왠지 영적으로 대단히 '눌린다'는 느낌까지 받게 해 주었다. 그 소리를 쫓다가 어느 틈엔가 잠이 들었나 보다. 따뜻한 물이 없으면 샤워를 못하는 룸메이트는 초저녁부터 몸을 뒤척이며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이제 제대로 이슬람문화권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지나 온 시간을 되짚어 보는 걸 보니 집을 떠나 멀리 와 있다는 걸 우리 몸의 인지체계가 이제서야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나 보다.
까르길에서 스리나가르까지는 204km의 거리다. 짐을 싸면서 룸메이트와 "야, 이젠 짐 풀고 싸는 일에 도사가 다 되었노라"고 농을 주고 받았다. 풀었던 짐을 차곡차곡 챙겨 배낭을 가뿐히 지고나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듯하다. 아침식사는 커피 한 잔에 삶은 콩과 미숫가루 한 잔으로 간단히 때우고 짐을 챙겨 찦차에 올랐다. 가는 길에 요기를 할 생각이다. 까르길은 이렇게 잠시 들러 하룻 밤 잠만 자고는 훌쩍 따나게 되었다. 모두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서둘러 대었지만 나는 어쩐지 이곳, 까르길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척박한 자연환경에 영토분쟁까지 걸머지고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까르길을 떠나 56km를 가니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드라스(Drass)다. 스리나가를를 가자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있는 도시, 드라스! 마치 아름다운 연인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가져야 하는 고통스런 불면의 밤처럼 드라스는 그저 황량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마을 어딘가에 이런 표지판이 있다고 한다. "세상에서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 가운데 두번째로 추운 곳(The second coldest inhabited place in the world)". 겨울철에는 영하 50도까지 온도가 떨어진단다. 길가에 있는 제법 그럴듯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벽에 호텔이라고 써붙여 놓은 걸 보니 숙박을 겸하고 있는 곳인듯 싶은데 내부벽을 온통 녹색 페인트로 채색한 것이며 테이블, 종업원들, 내놓은 음식까지 모두 소박하기 그지없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우리나라 시골 어디선가 보았을 듯 싶은 그런 정감있는 모습이다.
이런 지역을 지나면서 여행객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화장실 사용이었다. 차량이 황야지대를 한량없이 달리다 멈춰 서면 너나없이 화장실을 찾게 되는데 이럴 때 인도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Open place!". 저 넓은 자연 대지가 화장실이란다. 인도에서는 일단 도시를 벗어나면 사람들이 가장 낮은 자세로 앉아 있는 자연의 한 가운데, 그곳이 바로 뒤를 보는 자리, "천혜의 즉석 변소"다. 남자들이야 뒤돌아서서 해결하면 그만이지만, 여자들은 그야말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참아본다고 애를 써 보지만 며칠 지나면 자연법칙에 그냥 순응하는 수 밖에 없다. 이 때 여자들은 두, 세명씩 짝을 지어 그나마 후미져 보이는 곳으로 가서 한 사람이 망을 보는 사이에 나머지 사람들은 일을 보게 된다. 둘씩, 셋씩 짝을 지어 겸연쩍게 걸어가는 뒷 모습을 보는건 어쩐지 서로가 민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일을 마치고 시치미 뚝 떼고 돌아오는 모습을 마주할 때 양측이 보이게 되는 무관심한 듯 모른 척 해주는 모습이야말로 코메디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짐짓 '어디 다녀 오느냐'고 능청스럽게 묻는 일이야말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가혹행위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인도 화장실에는 화장지가 없다. 일이 끝나고 나면 물그릇을 오른손에 들고 왼손을 움직여 뒤를 처리한다. 바깥의 것(화장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손)을 믿는 인도인의 삶의 자세라고나 할까? 이처럼 더러운 일은 모두 왼손 차지다. 코를 풀고 귀를 청소하며 눈꼽을 떼는 것도 왼손이 하는 일이다. 목욕을 할 때는 오른손으로 상체를, 왼손으로 허리 아래 부분을 닦는다.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일, 즉 에너지 공급이라는 중대한 사명은 당연히 오른손이 수행한다. 헷갈릴 것 같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를 반복해 온 인도인은 복잡한 손의 분업에 대해 전혀 시행착오가 없다고 한다. 뭔가 부족해서 화장지의 두께를 늘리는 우리와는 다른 삶의 방식이다. 어느 쪽이 더 청결한지, 아니면 자연친화적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지만 재미있는 습속이다.
인도여행을 마치고 돌아 온 일행 한 분은 화장실이 눈에 띄기만 하면 조건반사식으로 화장실을 들르게 되는 이전에 없던 버릇이 새로이 생겨났단다. 인도에서 용변보는 일에 얼마나 곤란을 당했으면 그럴까 하면서 저절로 웃음을 짓게 한다.
드라스를 떠난 찦차는 또 다시 헐떡거리며 까마득한 낭떠러지길을 올라간다. 해발 3,534m의 조질 라다. 조질 라는 까르길과 스리나가르 사이에 놓인 고개길이다. 우리를 태운 찦차는 까마득하게 깎아지른 벼랑위의 길을 꾸불꾸불 휘돌아 가는데 왼쪽편으로 내려다 보이는 천 길 낭떠러지에 절로 오금이 저려온다. 여성 일행들은 아예 눈을 감고 머리를 다리사이에 감싸 안을 지경이다. 도로폭이 좁아 반대쪽에서 트럭이 올 때 마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에 저 아래 낭떠러지로 그냥 굴러 떨어지는 건 아닌가 쓸데없이 불길한 생각까지 든다. 이런 경우에 아무래도 우리 운전 기사는 잠깐잠깐씩이지만 찦차의 바퀴 한 쪽을 낭떠러지에 걸친 채 운전을 하는 것 같아 영 불안하기만 한데 이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라는듯 마치 곡예를 하듯 노련하게 잘도 운전을 한다. 이럴 때는 차라리 이런 스릴을 즐기는 것도 불안을 떨쳐버리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옆 자리에 앉은 일행에게 차창밖으로 떠미는 시늉을 하며 아이처럼 장난을 쳐 본다. 즐겁다. 비로소 우리가 지나 온 꼬블꼬블한 길이 그림처럼 산 허리를 감고 있는 모습이 아스라이 내려다 보인다. 하늘과 산과 빙하와 초원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다. 잠시 차에서 내려 사방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경관을 둘러본다. 천년설이 빙하를 이루며 길가까지 이어져 내려와 있고 군데군데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도로를 막아서기도 한다. 계속되는 설산들, 비슷비슷한 풍경들이었지만 이 거대한 풍경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지닌 고뇌는 한낱 티끌처럼 작게만 느껴졌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지긋이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에 그리도 집착하고 있는가? 내가 그토록 지키고자 발버둥쳐 왔던 체면이라든지 자존이라든지 하는 등등의 명제들은 대체 의미나 있는 몸짓이었을까?
이렇게 한편으로는 아찔한 벼랑길 위에서 오금을 졸이기도 하다가 때로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장대한 경치에 감탄의 환호를 지르기도 하면서 어느덧 조질 라를 넘어서니 바야흐로 새로운 경치가 눈앞에 전개되었다. 3,500m를 경계로 하여 사막의 대지는 빽빽한 침엽수림지대로 바뀌었다. 이곳까지 우리를 태우고 온 운전기사들이 새삼 예뻐 보였다. 아마 이들의 오지 운전기술은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결코 빠지지 않을 것이다. 감탄할 만한 전문가다운 운전수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속도면 예정보다 이른 시각에 스리나가르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고갯길을 완전히 내려서자 맑은 시냇물이 시원하게 흘러가는 주위로 예쁜 통나무 집들이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레를 떠 난 이후 처음으로 그럴싸한 음식을 먹은 것 같다. 다만 식사를 마친 일행 가운데 몇몇 여자분들이 칫솔을 입에 문 채 식당안을 마치 제 집처럼 어슬렁 거리며 다니는 모습은 몹시 눈에 거슬려 보였다. 우리 일행 이외에도 다른 여행객들이 있던 자리라 부끄럽기도 하고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이들은 이번 경우 말고도 주위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행동을 보이곤 하여 여행길의 기분을 망가뜨렸다. 나는 '알만한 사람들이'라든지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와 같은 말들로 남의 행동거지를 그 행위의 본질보다는 행위자의 지위나 지식수준을 앞세워 비난하는 묘한 말투를 몹시 경멸한다. 하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이 말을 반드시 써야겠다. "학교선생이라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중간에 도로가 막혀 시간을 많이 허비해야 햇다. 앞서 가던 트럭이 도로 중간에 있는 물구덩이에 박혀서 길을 막고 서 버리는 바람에 양방향의 차량들이 오도가도 못하게 되면서 언제 풀릴지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경찰도 나타나고 군부대 차량도 오고 애를 써 보지만 오늘 안에 길이 뚫릴지 불투명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두 시간 반만에 상황이 해결되어 목적지 스리나가르까지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었다. 잃어버린 낙원, 스리나가르가 거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한 편의 행복한 추억을 만들기가 시작될 것이다.
*드라스(Drass) -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추운 곳
*인도는 도시를 벗어나면 화장실이 없다. '자연'이 부르면 자연의 '변소'로 나간다
*빙하가 길가 도로까지 내려왔다
*까르길과 스리나가르 사이를 가로 지른 해발 3,534m의 조질 라를 넘어서
*말 그대로 "깎아지른" 절벽이 아찔하다
*조질 라 고개를 오르는 길이 산허리를 감듯 아스라이 보인다
*트럭이 길을 막아 섰다. 오늘 안에 길이 뚫릴런지.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은 또 다른 인내가 요구되는가 보다
*드디어 조질 라를 넘어서 반대 편 세계로 들어섰다. 실락원(失樂園 )이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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