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어버이날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래 가장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지난 1979년 여름 어머니가 일찌기 우리 곁을 떠나신 뒤 31년만인 작년 12월 21일 아버지 마저 어머니를 따라 그렇게 훌쩍 떠나신 후 첫번째로 맞이한 어버이날이기 때문이다. 이제 부모님 두 분 모두 우리 곁에 안 계신다. 천애의 고아가 따로 없는 셈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이 날을 핑계로 으레 형제들과 아버지를 찾아뵙고 하루를 함께 지내다 오곤 했었는데 이젠 그럴 일도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내가 홀로 되신 아버지를 찾아뵙는 일을 굳이 '핑계'거리 만들어야 될 일처럼 표현한 것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어서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홀로 되신 아버지께서는 지금의 새어머니와 12년 가까이 함께 지내시고 계셨다. 그런데, 새로 모신 분께서는 평소에는 아버지께는 그렇게 극진할 수 없다가도 가끔씩 성미를 부릴라 치면 대책이 없으신 성격이셨다. 우리 형제들과도 그리 따스한 정을 서로 나누지 못하고 지내왔다. 자연히 명절이나 특별한 일거리가 있을 때야 형제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을 뿐이고, 그렇지 않은 때에는 제각기들 따로따로 찾아뵙고 하는 정도가 되어 왔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이 찾아오는 걸 늘 반기셨지만 우리로서는 새어머니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아버님 댁 방문이 결코 편안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것도 참 후회막급인 일이 되고 말았다. 찾아뵙겠노라고 미리 전화를 드리면 우리 차가 나타날 때까지 아파트 입구에서 서성이며 우리를 기다리셨던 분인데 새어머니 눈치때문에 좀 더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는 것은 순전히 자기편의적이고 이기적인 구실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찾아뵙거나 전화로 안부를 여쭐 때마다, "큰 사람은 많이 바쁘지?", "그렇게 바빠서 어쩌냐?"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시고 걱정해 주기만 하실 뿐이지, 자주 좀 찾아 오라든지, 뭐가 아쉽다든지 하는 말씀을 직접 한 적이 결코 없으셨다. 아버지는 그저 오래 오래 늘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인데 실은 그게 아닌 것이어서 이처럼 때늦은 후회를 하고 마는 것이다. 불효가 따로 없다.
2001년말엔가 북창동 한국은행 근처에 '송원'이라는 유명한 복집이 있는데 그 집에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가 전해 받은 "허무"라는 시가 있었다.부모님 은혜에 관한 사언절귀의 한시인데, 어버이날에 회사 홈페이지에 올려 직원들과 돌려 보곤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다음 카페(cafe.daum.net/moneypluse)에서 같은 내용을 발견했는데 제목을 "권효가"라 하였고, 그 한글 번역 내용도 좀 더 세련되었으며, 뒷부분에 한, 두 구절이 추가되어서 아마도 이것이 완본인 듯 싶다.
"父生母育 그 은혜는 하늘같이 높건만은/청춘남녀 많은데도 효자효부 없는지라/출가하는 새아씨는 시부모를 싫어하고/결혼하는 아들네는 살림나기 바쁘도다. 제 자식이 장난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부모님이 훈계하면 듣기싫어 외면하네/시끄러운 아이소리 듣기좋아 즐겨하며/부모님이 두 말하면 잔소리라 관심없다. 제 자식의 오줌 똥은 맨손으로도 주무르나/부모님이 흘린 침은 더럽다고 멀리하네/과자봉지 들고와서 아이 손에 쥐어주고/부모위해 고기 한 근 사올 줄을 모르도다. 애완동물 병이나면 가축병원 달려가나/늙은부모 쓰러지면 노환이라 생각하네/열자식을 키운 부모 한결같이 키웠건만/열자식은 한 부모를 귀찮다고 싫어하네. 자식위해 쓰는 돈은 아낌없이 쓰건만은/부모 위해 쓰는 돈은 한 푼조차 아까우네/자식들을 데리고는 외식함도 자주하나/늙은 부모 모시고는 외식 한 번 힘들구나. 살아 생전 불효하고 죽고나면 효심날까/예문갖춰 부고내고 조문받고 부조받네/그대 몸이 소중커든 부모은덕 생각하고/서방님이 소중커든 시부모를 존중하라/가신 후에 후회말고 살아생전 효도하면/하늘에서 복을 주고 자녀에게 효를 받네."
셋째 동생이 새어머니를 모시고 부모님 묘소를 다녀왔노라고 전화 문자로 동영상을 보내왔다. 아이들 셋을 키우면서 빠듯하게 살아도 아버지께는 제일 살갑게 하는 동생부부다. 조카 유진이가 식사를 대접한 모양이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땐 평소 갈비를 즐겨하셔서 어머니 묘소에 갔다 오는 길에 축석령 검문소 옆에 있는 갈비집에 모시고 가서 식사 대접을 하면 그리도 맛있게 드시곤 했었는데.
딸 둘이 어버이날이라고 선물을 했다. 시진이는 캐쥬얼화를, 승희는 비타민제를. 관백이는 멀리 미국에서 전화로 인사를 대신해 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선물을 드릴 부모님은 이 세상에 안 계시고, 아이들부터 선물을 받는 입장만 되고 말았으니 이 슬프고 아픈 마음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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