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5일(화) 어머니 32주기 기제사일. 어머니 가신지 벌써 32년이라니 세월이 덧없다. 양주의 어느 절에서 공부를 하던 중 셋째 동생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며 찾아왔다. 병세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어른들이 동생을 보낸 모양이었다. 아침나절 책을 붙들고 있다 문득 눈을 들어 밖을 내다 보는데 동생의 모습이 저 멀리 언덕 아래로 얼핏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어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면서 주체할 수 없도록 슬프고 서러웠던 듯 싶다. 어머니와 나를 잇는 보이지 않는 끈이 내게 이런 방식으로 암시를 준 것 같다. 동생을 앞세워 급히 달려오니 이미 어머니는 말씀 한마디 못하시며 의식이 꺼져 가고 있었다. 주위 어른들이 '장남이 왔으니 어여 손이라도 잡아 보라'고 재촉하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무릎을 꿇고 어머니 손을 잡으며 "엄마, 나 왔어요"하고 어머니를 부르니 거짓말같이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아 당신 가슴에 얹으시는게 아닌가. 그렇게 마지막 숨을 끊지 않고 나를 기다리시다가 어머니는 가셨다. 말씀 한마디, 눈길 한 번 더 주지 않으시고.
단상1. 어머니의 흰 고무신 : 그 해 여름 절로 들어 가기 앞서 짐을 꾸리기 위해 집에 들렀다. 어머니는 늘 신발을 깨끗이 씻어 마루 끝에 뒤집어 널어 말리곤 하셨는데, 이 날 우연히 어머니 고무신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신발 밑바닥이 너무나 닯고 닯아 신발의 형태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침 학교 모의고사에서 받은 장학금 몇 만원을 갖고 있어 집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 이걸로 새 신발이나 사 신으세요"라며 얼마를 손에 쥐어 드렸다. 웬만해서는 "괜찮다, 너나 맛있는거 사 먹어라"고 하셨을 분이 이 때는 별 말씀 없이 그저 선한 얼굴을 보이며 선선히 받으셨던 걸로 기억된다. 이게 내 평생 어머니께 해 드린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 될 줄은, 어머니께 쥐어드린 유일한 용돈이 될 줄은 그 때는 미처 몰랐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집안을 정리하다가 어머니의 새 흰고무신을 발견하였다. 주위 동네 분들께 큰 아들이 장학금 받아 용돈을 주어 신발을 샀노라고 그리도 자랑을 하시더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런데 정작 어머니는 이 새 신발에 흙먼지 하나 묻히지 않고 그저 집안에 고히 모셔 놓고 있는게 아닌가. 어머니는 새 신발은 그저 눈으로만 신으셨을 뿐 돌아가실 때까지 그 밑바닥이 닯아 빠진 헌 신발을 여전히 신으셨던 것이다. 결국 새 신발은 한 번도 신어 보지도 않은 채. 어머니는 이 고무신을 얼마나 어루만지고 또 쓰다듬으셨을까.
단상2. 어머니의 속 내의 : 우리 형제는 모두 4형제다. 두 살, 세 살 터울로 아들만 내리 넷이다. 한창 자랄 때라 아이들 옷 사 대기도 수월치 않았을 것이다. 동생들은 맨날 큰 형 것만 물려 입는다며 볼멘 소리를 했지만, 솜씨 좋으신 어머니의 손길 덕택에 우리 형제들은 이웃의 여느 아이들 보다 늘 깔끔하게 차려 입고 다녀 물려 입은 태가 전혀 나지 않도록 해 주셨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 당신을 가꾸시는 데에는 그리 하지 못하셨던 걸 한 참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외가쪽 할머니께서 어머니를 깨끗한 옷으로 입혀 저승길로 보내 드려야 한다고 하여, 속옷이랑을 갈아 입히시게 되었다. 이 때 나는 비로서 어머니의 속 옷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또 웬 일인가? 어머니의 겉옷을 벗기자 아버지의 구멍 난 런닝셔츠를 입고 계시는 게 아닌가. 아버지가 더 입지 못할 셔츠를 버리지 않고 당신께서 입으신 것이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속에 입는데 누가 들여다 본다던?' 어머니는 평생 레이스 달린 여성용 내의를 입어 본 적이 없으셨던 것이다. 쭈그러져 처진 어머니의 젖무덤이 슬퍼 보였던 기억보다 이 찢어진 런닝셔츠가 지금껏 내 가슴을 저미어 오게 한다.
단상3. 어머니의 밥그릇 :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온 식구들이 둘러 앉아 밥을 먹으면 어머니는 나중에 혼자 드시거나 같이 먹더라도 바닥에서 드시곤 했다. 난 단 한 번도 "어머니, 올려 놓고 같이 드세요"라고 권해 보질 못했다. 당시야 누구나 할 것 없이 잡곡밥이 일상이던 때였다. 지금처럼 압력밥솥이 없던 시절에는 잡곡밥을 짓는 것도 여간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납작 보리씰을 따로 솥에 넣고 찐 다음, 쌀밥의 뜸이 들 때쯤에 찐 보리쌀을 쌀위에 얹는 것이다. 보리쌀의 물 양을 맞추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고, 찐보리쌀을 얹는 시간을 제대로 맞추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다. 이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밥이 질거나 선밥이 되어 버리고 만다. 문제는 이렇게 이층밥을 짓고 나서 쌀과 보리를 절묘하게 섞는 기술이다. 당연히 쌀과 보리를 골고루 섞어야 겠지만, 어머니는 식구들 밥을 푸실 때 당신만의 규칙을 갖고 계셨다. 우선, 위에 있는 보리를 한 쪽편으로 헤쳐 놓은 뒤에 맨 먼저 아버지 도시락을 순 쌀밥으로만 푸신다. 그리고 약간의 보리를 섞어 장남인 내 도시락을 담으신다. 그런 뒤에 아버지 진지, 내 밥, 아래 아우들의 도시락, 밥의 순서로 차례차례 푸시는데 당연히 뒤로 갈수록 보리쌀의 양이 점점 늘어 나게 된다. 문제는 맨 마지막으로 어머니 밥을 푸시는데 이게 쌀 보다는 보리쌀이 태반이라는 점이다. 나는 속으로는 '어머니는 왜 저렇게 보리밥만 드실까?' 하고 생각은 하면서도 "어머니, 그리 하지 마시고 골고루 섞어서 같이 드세요"라고 빈말이라도 한번 말씀을 드려 본 적이 없이 내 밥만 꾸역꾸역 먹었을 뿐이었다. 요즈음 들어서 보리밥을 무슨 별미니, 웰빙 식품이니 하고 오히려 쌀밥보다 더 비싼 값에 찾아 다니며 먹곤 하지만, 나는 보리밥을 볼 때 마다 어머니의 깡보리밥이 생각나서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목이 메인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에 제사를 모시려고 어머니가 잡수시던 밥그릇을 찾았는데 '아, 어머니의 밥그릇이란 건 처음부터 우리 집엔 아예 없었던 게 아닌가'. 그저 국그릇에 밥과 반찬을 한꺼번에 섞거나 국에 밥을 말아드셨을 뿐 당신의 밥그릇에 제대로 밥을 퍼 드신 적이 없었던 일을 어째 그 때는 알아 채지도 못했을까? 미련하고 이기적인 내 자신이 밉다.
지난 해 12월 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뒤 첫번째 맞는 어머니 기제사일이다. 지금껏 아버지께서 살고계신 의정부를 찾아가서 어머니 제사와 차례를 모셨으나 이제 우리 집에서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며칠 전에 의정부를 찾아가 청수(淸水)를 모시고 두 분 모두 이제 우리 집으로 모시고 가겠노라고 고(告)하는 간략한 의식절차를 가졌다. 제사일에 맞춰 집안 구석구석 청소랑, 제물을 준비하는 일이 간단치 않다. 아내가 혼자서 애를 많이 썼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비록 어머니 기제사일이지만 아버지 혼령도 모셔 합설(合設)하였다. 합설을 하면서 어머니 지방만 모셨지만, 이리저리 탐문해 보니 아버지 지방도 함께 모시는게 예의에 맞는다고 한다. 다음부터는 그리 해야 겠다. 이밖에도 우리 집안 나름대로 지켜온 제사 식순도 다소 보완하였으나 좀 더 다듬을 부분이 있어 보인다. 아직 한가지 결심을 못한 점은 아버지 생전에도 늘 그랬듯이 그동안 기제사를 (음력으로) 돌아 가신 전일 밤 9시에 지내는 것이 옳은가 하는 점이다. 가정의례준칙에는 돌아가신 날 밤 7시에서 9시사이에 지내도록 되어 있고, 전통적으로는 돌아가신 전 날 밤 11시, 따라서 돌아가신 날의 자시(子時)에 지내도록 되어 있는데, 예전에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 자손들의 편의를 위해 밤 11시를 앞당겨서 9시로 지내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고 우리 집안에서도 그렇게 해 왔던 것이나 이는 결코 옳은 법도는 아니다. 이 점은 아우들과 상의해서 결정해야 할 듯 하다.
어머니는 내게 여신(女神)과 같으신 분이고 관세음보살과 같은 분이다. 지금도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늘 '어머니!'하며 도움을 청하곤 한다. 그러면 어머니가 어디선가 내 목소리를 들으시는 것만 같고, 나를 붙들어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만 같아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곤 한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시다. 내가 찾을 때면 여지없이 손을 내밀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이런 분께 나는 어떤 아들이었을까?, 또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어머니는 뭐라 하실까? 어머니 기제사일을 맞아 살아 생전에 어머니께 조금만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살갑게 해드리지 못했던 일이 자꾸자꾸 마음에 걸린다. 나는 참으로 못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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