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8일(화)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을 방문했다. 이곳에서는 매년 봄, 가을 두차례씩 소장 미술품을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무료 기획전시회를 개최해 오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 81번째 행사로 10월16일부터 30일까지 보름간 "풍속인물화대전"을 열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일반인의 관람이 제한되기 때문에 일반인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이곳에 보관된 수많은 귀중한 문화재를 접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전시회에도 일반인의 관심이 뜨거워 관람대기시간이 3시간이상 소요될 정도였다. 24일 현재 이미 6만여명 이상이 관람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추세라면 10만명을 상회했을 것이다.
이 날은 이 근처에 사무실을 두고 출판업을 하고 있는 고교동창인 김옥철 사장의 주선으로 10명의 친구들이 오랫만에 눈 호강을 실컷하게 되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보성학교 재단이사장으로 학교발전에 남다른 애정을 쏟은 분이기 때문에 우리들과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신 분이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간송선생님께서 이미 작고하신 뒤라 그 분의 미망인이신 김점순여사께서 재단이사장을 맡고 계셨다. 입학식때 호명을 받고 이 분으로부터 직접 장학증서를 받던 일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여러차례 간송장학금을 받았으니 나는 간송선생님께 단단히 빚을 진 셈이다. 고등학교 2학년말쯤에 학내문제로 학교측과 갈등이 있을 때 이곳에 불려와 당시 교장선생님이시던 전성우선배(43회, 간송선생님 자제)로부터 학교발전계획을 전해 들으며 학업에 매진하라는 일종의 훈시를 듣던 일이 엊그제 일인양 떠오른다. 졸업이후 38년만에 처음으로 이곳을 찾으니 세월이 실로 무상할 뿐이다.
김옥철 사장은 평소 문화의 향취에 잔뜩 목말라 하던 우리를 위해 어렵게 탁현균 교수를 초청하여 이 날 주요 전시품을 일일이 설명케 하니 우리는 소중한 문화강좌를 청취하며 마냥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번 전시회에는 교과서 미술도록을 통해 한 번쯤은 보아왔던 겸재 정선으로부터 신윤복, 김홍도, 장승업과 이밖에 조영석(1686~1761), 김득신(1754~1822) 등 52명의 조선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탁교수의 설명이 얼마나 현실감이 있던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활동사진을 보는듯 했다. 작품속 인물들이 그림속으로부터 걸어나와 우리 앞에 서 있는듯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생생하고, 저 멀리 악공의 악기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듯한데 여인네들의 수줍은듯 요염한듯 반쯤 감은 눈매가 그윽한 향내속에 보는 이를 꿈꾸는듯 아찔한 느낌에 빠져 들게한다. 몇 백년 전의 작품들이 어쩌면 이토록 곱고 아름다운 색을 지켜내고 있는 것을까?
간송미술관은 1년에 봄, 가을 두차례만 일반인에게 무료로 기획전시회 형식으로 관람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소중한 문화재를 일반인을 위해 개방하고 있는 일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이 번에 가서 보니 관람방식은 그 개선이 필요해 보였다. 주말에 3,4시간씩 기다려 1만여명(평일 5천여명)의 관람객을 수용하기에는 내부 공간이 너무 협소해 작품감상을 위한 최소한의 분위기 유지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뿐만아니라 유리속의 작품들은 불빛에 반사되어 그 고유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감상하기도 불편했다. 요즈음 백화점에 가 보면 명품관이라는데에서도 한 번에 입장하는 인원을 한정하기도 하던데, 미술관에서도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관람객이 몰린다면 시간대별로 나누어 입장인원을 제한하는 방식을 고려해 볼만 하지 않을까? 이 경우에 전문 해설자를 배치하여 관람객들의 이해도 돕고 한정된 시간내에 관람을 마치도록 유도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치 골프장에서 캐디가 따라붙듯이 말이다. 무료관람의 원칙을 고수하는 미술관의 의도는 높이 살만하지만 관람 후에 자발적인 기부(donation)를 유도하는 것도 아이디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간송미술관에 대한 나의 남다른 애정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생각을 해 본 것이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앞으로도이런 의미있는 전시회가 모쪼록 계속 지속발전되었으면 바램이다.
눈이 즐거웠으니 어찌 뒤풀이가 빠질 수 있으랴? 가을이 물씬 깊어가니 우리들 마음의 고향인 이곳에서 격의없이 술잔을 기울이니 밤이 깊어 가는 줄도 잊었다. 오늘 행사에는 유승식군의 초등학교 동창인 김애경씨가 특별 게스트로 참석하여 우리들의 영아적 회귀를 지켜봐 주었다. 애경씨는 이화여고를 나온 분으로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는 저명인사가 된지 이미 오래다. 남녀학생이 만나는데 남의 시선도 의식해야 했고 많은 제약도 있던 시절이지만 수줍은듯 어찌어찌 만나기도 했을 것이고, 눈은 내리깔고 있어도 내숭떨듯 점찍어 놓은 마음의 짝도 하나쯤은 있어 홀로 가슴 절이던 추억거리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제약이 많으면 그만큼 관심도 높은 법이라서 한 다리 건너면 이리저리 얽히는 사이가 되는 손바닥만큼 빤한 사춘기시절 우리들의 모습이다. 혜원이 계시다면 오늘 우리들의 이 어울림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냈을까?
*이봉훈, 김태환, 양세광, 박상인, 이창길, 김옥철, 안문배(좌로부터)
*탁현균 교수(좌측)과 김옥철 사장
*여흥(餘興)- 뒷면 거울에 사진찍고 있는 안문배 군의 상이 보이고, 좌측 끄트머리 두번째에 김애경씨 머리가 숨어 있다
앞줄부터 강건구, 성하운, 김승태, 유승식 군의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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