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김은국의 "순교자"

양현재 사색 2011. 7. 6. 19:00

이 소설 "순교자"는 이렇게 시작된다. "1950년 6월 어느 이른 아침 전쟁이 터졌고 북한 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했을 무렵 우리는 인류문명사 담당 강사로 재직했던 대학을 이미 떠난 뒤였다." 이 귀절에 끌려 책을 잡게 되었다. 나는 6.25와 남다른 숙명적 인연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금년은 6.25전쟁 발발 61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문학계는 6.25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 창작에 인색한 편이다. '현대 한국인의 육신과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 그 전쟁의 경험을 본격적으로 다루어 낸 소설이 지금 이 시점까지 대체 몇 권이나 나와 있는가?'(도정일 교수)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런 현상은 문학계만의 일은 아닌듯 싶다. 소위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이 진지한 성찰은 뒤로 한 채 좌니 우니 하는 이분법적 편가르기만 하다 보니 이 와중에 우리 대중들은 극심한 인식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간 반공 일변도의 주의, 주장속에 익숙해 왔던 사회적 분위기가 어느 틈엔가 '반공'이야기만 꺼내도 보수, 구세대라는 눈총을 받게 되었고, 그렇다 보니 자유니 민주에 바탕을 둔 소신을 피력하는데에도 주위의 눈치부터 살펴 쭈뼛거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반면에 예전에는 금기시되었던 주위 일가친척이 월북을 했느니 빨치산 활동을 했느니 하는 경력같은 것을 은근히 과시하는 분위기도 생겨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민족내부의 갈등이었고, 북이 남을 지배하고, 남이 북을 지배하는 뺏고 뺏기는 전란의 와중에 민초들은 자신의 의지나 선택과는 무관하게 좌, 우에 줄을 서게 됨으로써 반공을 했느니, 친공을 했느니 하는 사실로 종전 후에 더 아픈 역사의 희생양이 된 것도 사실이다. 세월이 흘러 역사를 민초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게 됨으로써 덮어져 왔던 이면이 드러나게 되자  이런 인식의 혼란을 가져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학이건, 사회사조의 연구에서건 좀 더 냉철하게 6.25전쟁을 소재로 다룰만큼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덜 성숙된 것은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우리들로 하여금 또 다른 역사인식의 지평을 제시해 준  작품 중에 하나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소설 "순교자"는 김은국의 영문소설 "The Martyred"(1964)의 한글 번역판이다. 이 작품의 초판 출간 당시 뉴욕타임즈는 '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 카뮈의 위대한 전통 속에 있다'고 평가하고, LA타임즈는 '이것은 우리가 위대한 소설이라 부를 소수의 20세기 작품군에 포함될 만한 눈부시고 강력한 소설(brilliant and powerful novel)'이라고 경탄한 바 있다. 작가는 1967년에는 한국계 미국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올랐다.

 

전쟁이 휴전상태로 종식된 시점에서부터 계산해 보면 불과 10년만에 이 작품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실로 경이롭다고 하겠다. 더우기 전쟁의 한 가운데에 있던 젊은 작가는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의 언어가 아닌 영어로 이 작품을 발표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부산까지 떠밀렸던 국군이 평양까지 밀고 올라간 뒤 공산당국에 끌려간 14명의 목사들 가운데 12명은 총살을 당하고 2명만이 살아남게 된 사실을 접하게 된다. 육본 정보국 파견대장 장대령은 어떻게 두 사람만- 신목사와 한목사-이 총살을 면하고 살아남게 되었는가를 파고들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이 문제를 캐고 드는 이유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이다. 그의 동기는 진실 발견에 있지 않고 국가이익의 보호와 선전목적을 위해 거룩한 기독교 '순교자'들을 만들어 내는데 있다. 그가 쫓는 것은 생존자 신목사이고 신목사만이 아는 비밀의 성격()반역, 배반, 부역)을 미리 탐지해서 '순교자 만들기'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 목적이다. 장대령의 부하인 정보장교 이 대위(소설 도입부의 대학 시간강사)는 신목사에게서 12명의 목사들의 처형 현장의 진실을 알아내고자 하지만, 그 진실이 장대령이 추구하는 포장된 진실과는 맞지 않는, 즉 죽은 목사들이 모두 거룩한 순교자는 아니라는 난처한 진실을 알게 되고 이 고약한 진실을 덮으려는 장대령과 충돌한다. 살아남은 신목사는 자신이 처형 현장에서 '다른 목사들을 배반했노라'고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기를 포기하는 대신 죽은 목사들을 모두 거룩한 순교자로 만든다. 이런 와중에 또 다른 한사람의 등장인물, 이대위의 친구이고 죽은 박목사의 아들인 해병대위 박인도는 그가 경멸해 마지 않는 '광신적'인 아버지 박목사가 처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림없는 기독교도로 죽어갔는지 어떤지의 여부를 알고 싶어 한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한국인이고 사건무대도 한국전쟁이지만 소설의 주제 자체는 너무도 서구적인 것이어서 그 서구적 주제와 한국인의 경험내용 사이에는 잇기 어려운 간극이 존재하고 있어 왠지 낯설고 어색함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처형당한 12명의 목사와 살아 남은 2명의 목사라는 사건을 인간의 보편적 운명에 관한 '세계문학적' 주제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은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도정일 교수)  

죽음은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며 그 운명에 내포된 인간의 절망, 괴로움, 수난, 불의는 인간의 보편적 고통이다. 그런데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의미가 있는가?, '이 무의미한 세계에 사는 인간은 어디서 어떻게 의미를 얻고 자기 존재의 품위는 어떻게 확보하는가?' 이와 같은 '문제구성력'이 절대적으로 빈곤한 한국문학의 고질적 문제에 대하여 이 소설은 우리들에게 준엄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