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박완서 "엄마의 말뚝"

양현재 사색 2011. 7. 11. 00:59

예전에 읽었던 박완서씨의 연작소설 "엄마의 말뚝"을 다시 꺼내 읽다. "엄마의 말뚝" 연작은 모두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은 일제시대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신교육을 시키기 위해 시댁인 개성을 떠나 서울의 문밖인 현저동 꼭대기에 알량한 기와집을 마련하기 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고, 2편은 말년에 사고로 넘어진 어머니가 약간의 혼수상태를 겪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대비히는 대목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3편은 사고 후 7년을 더 사신 어머니의 일상과,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남겨진 가족들이 그녀의 죽음을 수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박완서씨의 자전적 소설은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 소설 속의 스토리를 좇다 보면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가족사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금년 1월22일 작가가 타계했을 때 친척분을 잃은듯 가슴이 아팠다. 더 이상 이 분으로부터 우리네 살아 온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에.

 

"엄마의 말뚝 1"에서 '말뚝'은 어머니와 그 가족의 서울 입성을 의미하는 '집'의 비유였다. 그러나 "엄마의 말뚝 3"에 이르면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은유가 아니게 된다. 어머니는 죽음을 통해 스스로가 '말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 집의 문패가 그러하듯, 비석을 대신한 엄마의 말뚝은 역설적으로 엄마의 삶을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증거하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의 영역을 표시하는 소유권의 표식처럼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김경수)

"삼우날 다시 찾은 산소에서 나는 어머니의 성함이 한 개의 말뚝이 되어 꽂혀 있는 걸 보았다". "어머니의 함자는 몸 기(己)자, 잘 숙(宿)자"였던 것이다.

 

"엄마의 말뚝" 연작은 일차적으로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어머니들의 삶의 한 판본으로서 이것만으로도 이 시대를 살은 여성들의 삶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면서, 엄마의 삶의 전 과정이 딸의 시각과 입을 통해 증언되는 형식을 취하면서 이 땅의 여성들이 남성중심 사회에서 드디어 독자적 자아로 서 나가는 변신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서양에서 여성들이 남성중심주의 사상의 굴레에서 벗어난 계기를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찾고 있는데 이 작품이 1879년에 발표된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 여성들의 가정내, 사회에서 보여지고 있는 위상의 변화는 실로 짧은 기간내에 이루어 낸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오로지 남편에게 순종하고 가정에 충실하는 전통여성의 모습을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우리 여성들의 자기정체성 회복이 계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작가는 1931년생으로 1953년에 결혼하여 1남4녀(1954년, 1955년, 1958년, 1960년, 1963년생)를 두었다. 우리 어머니가 1929년생이시고, 내가 작가의 큰 딸과 동갑이니 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의 무대와 스토리는 나에게는 1세대 앞선 어머니세대의 그것들이다.  "엄마의 말뚝"을 읽으며 나는 또 다시 나의 어머니를 떠 올려본다. 어머니의 말뚝은 무엇이었을까? 기회가 되면 나의 어머니께 당신의 말뚝을 찾아 드리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고 싶다."(김춘수의 시 "꽃")

누군가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고자 함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존재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닐까? 수천 송이 중에서 단 한 송이의 꽃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