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북창동

양현재 사색 2011. 4. 29. 14:15

오늘 옛 직장 후배와 점심약속이 있어 오전에는 집에서 밀린 일을 보았다. 만울님과 함께 낮시간에 집에 있는게 아직도 낯설기만 하니 난 아직도 이 방면엔 초보인가 보다. 잠깐 동안 지켜보았지만, 이 아침시간에도 만울님은 늘 그래왔듯이 종종걸음을 치며 바쁘기만 하다. 남들은 아이들 모두 출근시키고 나면 이럴 때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잘도 갖는다던데. 설겆이하고, 방 청소하고, 그리고 내 방으로 오더니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를 밀쳐내면서 강의준비를 해야 한단다. "대단한 아줌씨입니다, 그죠?"  관백이 책상으로 밀려나와 자료를 정리하는데 김&장 법률사무소의 신변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입안에 가시가 생긴듯 입맛이 쓰다.

 

점심약속 장소는 북창동이다. 옛직장이 남창동에 있었다. 남창동, 북창동의 이름의 유래가 조선시대에 이곳에 군량미 창고가 있었다던가? 이 동네에서 나는 27년의 직장생활을 했다. 실로 눈 감고도 다닐 정도로 이 지역에 익숙하고 정도 많이 들었다. 내 청춘의 온갖 애환이 이 거리 구석구석에 뭍어 있을 것이다. 지금도 숭례문 앞을 지날 때는 가슴이 뛴다. 설랜다든지 그립다든지 하는 감정하고는 다른 무엇이다. 애틋함이라 할까? 뭔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굳이 부끄러울 것도 없는 흘러간 내 인생의 궤적에 대한 느낌같은 것일까? 1981년 대학 졸업 후 이곳에 자리를 잡을 당시 북창동 끄트머리에는 중국사람들이 운영하는 중국집들이 제법 남아 있었는데, 어느 한 집의 물만두 맛이 일품이었다.그 집 상호가 취영루였던가? 플라지 호텔이 들어서고 이곳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이들 중국인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고, 80년대 중후반부터는 소위 룸살롱 밀집지역이 되었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니까 92년 말에는 왜 그렇게 이런 술집을 들낙거렸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당시 직장내 음주문화가 그랬던 듯 싶다. 서울에서 술접대를 한다고 하면 으례 이곳을 떠 올리던 때였던 것 같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도 그곳 순례 한 번 해야겠다며 안내를 청하곤 했으니까. 2002년 회사의 대주주가 바뀌면서 이런 종류의 술집 출입이 끊어 진 걸 보면, 음주문화도 시대를 따라 바뀐다는 생각이 맞는 것 같다. 지금은 단란주점 또는 비지니스클럽이라고 하던 업소들 대신  노래방이나 음식점들로이 그 자리의 주인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북창동 초입에는 지금도 한, 두군데 중국사람들이 운영하는 중국식품재료 판매가게가 남아 있다. 언젠가 이곳에서 짜장을 사서 집에서 직접 짜장요리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유난희 국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만들어 주시곤 했던 짜장 맛을 기대하며. 그 이후에 다시는 짜장이든 다른 중국 식자재를 구입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때 내가 발휘한 요리 솜씨가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토요일 오후에 반나절 근무를 마치고 나면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남대문시장 곳곳을 둘러보며 이것 저것 샀던 기억도 든다. 주로 옷가지들이었는데, 이것도 요령이 있어서 처음에는 어디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또는 마음에 드는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 쭈욱 일견하고 나서 2, 3군데를 점찍어 본격적으로 물건의 질이나 값을 흥정하는 방식이다. 나중에는 이게 익숙해져서 시장 전체를 순례해야 하는 수고를 많이 덜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주로 구입하는 옷가지라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브랜드처럼 그리 내세울 게 있는게 아니었지만 내 나름대로는 이곳의 물건과 품질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만울님은 꼭 백화점이나 브랜드세일 매장을 찾아 물건을 사 오곤 하는데, 이럴 때마다 나는 품질이며 가격을 은근히 트집잡으며 타박을 하곤 했다. '남대문시장에 가면 얼마만 주면 골라잡을 수 있는데 바가지 썼다'며 난 우선 값을 후려치면서 기선을 제압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만울님은 자기 옷은 몰라도 내 옷가지를 사오는 일은 아주 드물다.

 

내가 이곳을 떠났으면서도 아직까지 찾는 곳은 안경점 두 곳 뿐이다. 한 곳은 샬롬안경점이고, 다른 한 곳은 남대문 안경점인데 샬롬은 내 안경 단골점이고 남대문은 관백이의 단골점이다. 특히 남대문 안경점 사장님의 영업방식이 특이해서 이곳은 남대문의 그 많은 안경점 가운데에서도 늘 문전성시를 이룬다. 안경상담은 점포의 종업원들의 담당이지만, 안경도수를 측정하는 것은 사장님 몫이다. 그런데 안경도수를 재고 나서는 이 사장님이 꼭 에누리라는 걸 해 준다. 손님으로서는 이미 흥정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이런 호의를 받으면 자기만 특별대우를 받는 기분이 들게 되고 신뢰를 갖게된다. 나도 이곳에 들를 때는 이 가게 사장님이 계신지 우선 밖에서 살핀 다음 사장님이 안에 계시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가게를 들어선다.

 

북창동에 얽힌 나와의 인연 쌓기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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