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은 이평노상무와 같이 하였다. 아이디어 뱅크라 불릴 정도로 머리 회전이 뛰어날 뿐 아니라 늘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고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등 장점을 고루 갖춘 친구다. 점심을 먹고 선정릉 앞 찻집에 앉아 차향기를 음미하며 봄의 향기를 들이키다. 아직 쌀쌀한 봄바람이 옷속을 파고들지만 꽃향기와 함께 전해오는 봄 날의 이 느긋하고 편안함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있는 이곳 선정릉은 행정구역으로는 삼성동이고 선릉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강남 테헤란로의 살벌함을 한 발짝만 빗겨나면 이런 녹지공원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선정릉은 선삼릉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9대 성종의 선릉과 11대 중종의 정릉, 그리고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의 3개 능이 자리하고 있다. 학창시절에는 소풍 때나 되어야 방문할 수 있는 곳이 왕릉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가까이에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어 언제고 나의 피곤한 심신을 달랠 수 있을 것만 같은 곳이다. 에르고시절 봄이 오면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여 소풍을 가자고 별렀는데, 지난 두 해 동안 그런 소박한 소망 한 번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나이를 하나씩 더 할 수록 확실해지는 진리 중 하나.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들랑 뒷 날 해야지 하고 마루지 말고, 그런 생각이 들 때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길 것". 명심할 일이다.
선정릉에는 슬픈 사연도 많다고 한다. 이곳 강남일대에 물난리가 나서 능지역이 침수되는가 하면, 화재로 재실, 정각 등이 불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가슴 아프고 몸서리쳐지는 일은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선정릉을 파헤쳐 이 분들의 시신을 훼손했던 일일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이곳 능에는 시신 대신 소각한 부장품이 매장되어 있단다. 천인공노할 왜놈들이다. 임진왜란의 참상은 이렇게 선대 왕들의 능에까지 미쳤다고 하니 살아있는 생명에게 어떤 만행이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상상조차 안된다.
이런 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선정릉안에는 봄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직장인들인지 한 그룹의 사람들이 봄 날을 희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