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문훈숙의 발레이야기

양현재 사색 2011. 5. 19. 00:55

5월16일(월) 오후 7시 30분 대학로에 있는 예술가의 집에서 이 시대를 살고있는 예술가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예술가로서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들어보는 "우리시대 예술가의 명강의" 시리즈 1탄의 세번째 순서로 발레리나 문훈숙씨 강의가 진행되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이 명강의 시리즈는 지난 3월 문학평론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을 시작으로, 4월 소나무 사진작가 배병우 교수, 그리고 이번 5월에 문훈숙 단장이 각각 초대되었다. 매번 150명의 청중이 참가하는 이 명강의 시리즈에 나는 지난 4월부터 참석하여 이 분들의 강의를 듣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다.  

 

나는 클래식음악을 즐기고, 유명 교향악단이나 연주가들의 공연을 가능하면 찾아 다니는 편이지만 발레 장르는 웬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진다. 최근에 EBS TV에서 방영한 러시아 기행프로그램에서 발레학교와 학생들의 수련모습을 보고 색 다른 아름다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발레리나를 만나 발레이야기를 듣게 되어 내심 마음이 설레며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1963년 1월 25일생인 문훈숙씨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태어나 8살 때 선화예술학교 입학,  이 학교 졸업 후 영국 로얄발레단에의 유학을 시작으로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워싱턴 발레단을 두루 거친 뒤 귀국하여 1984년 유니버설 발레단의 창단멤버로 합류하여, 1995년 단장에 선임되고, 2004년부터는 유니버설문화재단 이사장을 겸임하고 있다. 문단장은 1989년에는 세계 5대 발레단의 하나인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 초청으로 '지젤'의 주역 무용수로 무대에 올라 7차례의 커튼 콜을 받기도 했는데, 환상의 지젤, 춤추는 동양의 나비, 한국인 최초의 워싱턴 발레단 솔리스트, 키로프 극장에 선 최초의 동양인이라는 가지가지 수식어가 문단장의 화려한 경력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화려함이 문단장을 더욱 신비스럽게 해 주었으나, 강연을 통해 만나 본 이 분은 겸손한 프로페셔날이고  몹시 수줍음 많은 소녀였다. 혹독한 수련과 고통을 보냈던 만큼 무대공포에 익숙해 질 만도 한데, 그는 막이 오르기 전에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늘 어디론가 도망쳐 숨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고 고백한다. 한 때 너무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함께 춤추는 남자 무용수의 눈을 5초간 응시할 수 없어 애를 먹었노라고 한숨 섞인 술회를 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극장에 들어갈 때마다 성당에 들어가는 기분"이라며, 무대 전체가 성스러운 곳이요, 자기 영혼의 내면을 표출하는 장소라는 신념을 내보일 때는 강인한 정신의 일단을 엿볼 수 있어 섬뜩한 느낌까지 든다. 어쩔 수 없는 동양인의 신체적 핸디캡을 안고서 지고한 서양예술의 정수를 내면세계의 심연 속에서 소화하고 이를 온 몸으로 발산해 내는 내공이 아닐까?

 

 

 

 

거의 화장기 없는 맨 얼굴, 흰 빛깔의 넉넉한 품의 겉 옷에 살포시 비쳐나는 붉은색의 안감의 조화가 수채화를 그려낸 듯 하다. 목선에서 어깨, 팔로 내려오는 선이 특히 아름답다고 알려진 문단장. 돈키호테의 한 장면을 직접 연기해 보이는 얼굴표정의 순간적 변화, 감정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부채를 부치는 팔동작의 미세한 차이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문훈숙 단장의 본명은 박훈숙. 통일교 박보희 씨의 딸, 문선명 교주의 둘째 아들과의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예비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숨지자 21살의 나이에 영혼결혼. 그리고 27년의 세월, 유니버설 발레단 창단 27년. 아름다움이 너무 고결하다 못해 슬프다. 영원한 지젤! 최근 내한 공연을 한 안네 소피 무터와 1963년 동갑이다. 토끼띠인가?

 

 

창작 발레인 심청전을 제작하여 지금도 꾸준히 세계에 우리의 이야기를 알리고 있고, 콧대 높은 발레를 친절한 발레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벌이고 있는 경영인, 문훈숙 단장. "객석에 앉아 무대를 보면 공주에서 평민이 된 느낌이 들어요, 왕관을 벗은". 나는 이런 본심에 용기를 보태고 싶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 나는 무대에서 그의 공연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 본다. "藝天美地", 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예술인 문훈숙의 씩씩한 세상살이가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기원하며 힘찬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