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3일(월) 김지하씨 강연회에 참석했다. 김지하씨가 누구던가? 70년대 그 암울하던 시절에 군사독재에 온 몸으로 항거를 하던 반체재 저항시인. 1964년 한일회담 반대주모자로 투옥된 이래 1970년 사상계에 실린 '오적'시 필화사건으로 반공법 위반으로 다시 투옥,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모질게 이어 온 그의 투쟁은 우리 세대의 가슴에 한 줄기 등대불이 아니었던가? 오늘 그 분을 처음으로 직접 만나 볼 기회를 얻은 것이다.
신동아 창간 80주년 기념 릴레이 강연 "한국 지성에게 미래를 묻다"의 첫번 째 강연자로 김지하씨가 초청된 것이다. 종로 문호아트홀에서 개최된 이 날 강연에는 200여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는데, 나와 같은 생각들 이었던지 60, 70대의 노년층이 다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몸이 불편한건지 아니면 어디를 다쳐서 그런지 한 쪽 목발을 짚은 채 개량 한복을 입고 나타난 시인의 모습에는 여전히 강인하고 꼿꼿한 반골투사의 흔적이 역력했다. 1941년 2월생이니 올해로 일흔 하나다. 그 연세에 머리숱이 무척 풍성하고 멋대로 빗어 넘긴 머리모양이 그 분의 이미지에 잘 어울려 보였다. 굵고 다소 저음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쳐났고,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이 날 김시인은 모심(섬김과 母心)사상에 대하여 강연을 했는데, 시인의 부인인 토지문화관 김영주 관장의 조언에 따라 어려운 이야기는 빼기로 하고 강연요청을 수락했다고 한다. '맨날 민중, 민중 하면서 여성이나 아기들, 또 쓸쓸한 사람들 그 누구더러 들으라고 주역이니 정역이니 산알이니 그 어려운 얘기를 혼자서 즐기느냐?'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강연내용을 프린트해서 배포해 주는 친절을 베풀었고, 시인은 이를 낭독하며 중간중간 생각을 더해 풀어주는 방식으로 강연을 진행해 나갔다.
현대 인류의 최고의 도덕률을 단 한마디로 '모심'으로 규정한다. "살림(生)의 힘은 모심에 있고, 모심과 살림만이 우리 시대의 아픔들을 치유할 수 있다" , "인류와 지구의 대혼돈을 넘어서는 길은 단 한가지,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막론하고 일체 존재를 다 같이 우주공동주체로 거룩하게 드높이는 모심의 문화, 모심의 생활양식으로 현대인간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변혁하는 그 것 뿐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 모심사상을 위해 남은 열정을 바치겠노라고 이렇게 다짐한다, "가다가 가다가 몇 번이나 죽을 각오가 돼있다. 열정없이는 삶은 아예 없는 것"이라고. 죽음과 죽임이라는 실존의 극단을 경험한 그가 어두움의 끝자락에서 '생명사상'에 심취한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부터 동학사상에 친숙하다고 자부해 온 나도 김시인의 박학한 지식앞에서는 그저 경탄을 금치 못 할 뿐이었다. "동학은 생명사상이며, 侍, 한 글자야말로 천지만물의 생존과 변화의 비밀이다".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侍라는 것은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氣化가 있어서 온 세상사람이 각각 옮기지 못할 것을 아는 것이고, 主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마찬가지로 섬긴다는 뜻이다). 우리 아버님 묘비석에 있는 글이다.
철학, 문학, 사회사조를 넘다드는 김 시인의 강연내용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나의 지식수준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단지 모심은 여성모심이어야 한다는 점이 이채로웠고, 정운찬 전 총리의 동반성장,이익공유제에 대한 지지를 보이면서 이러한 주장이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있어서 획기적 재분배의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화두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점도 흥미로웠다.
우리 세대에서는 김지하씨 이름을 입에 담아 전하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압제와 공포 속에서 살아왔고, 꾸깃꾸깃 종이에 적힌 '오적'을 남몰래 숨죽이며 읽는 것만으로도 마치 큰 모의를 감행하듯 가슴 떨며 살아왔다. 세월이 흘러 이 분의 육성을 찾아 듣게 되었으나, 예정보다 1시간을 훌쩍 넘겨 2시간 30분이나 진행된 묵직한 주제의 강연을 마치고 길을 나서는 내 마음 속은 어두운 밤길만큼이나 더욱 혼란스러우니 이건 또 내 안의 웬 마구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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